호리오 요시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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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리오 요시하루는 1543년 오와리 국에서 태어난 무장으로, 이와쿠라 오다 씨를 섬기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충성했다. 히데요시 휘하에서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오다와라 정벌 후 하마마쓰 12만 석을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아들 타다우지가 활약하여 이즈모국에 24만 석의 영지를 얻었으며, 이후 은퇴하여 1611년 사망했다. 그는 '호토케 노 모스케'로 불릴 만큼 온화한 인품으로 존경받았으며, 그의 가문은 3대 만에 개역되었지만, 후손들은 여러 다이묘 가문에 봉사하며 명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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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오 요시하루 | |
---|---|
기본 정보 | |
이름 | 호리오 요시하루 |
원어 이름 | 堀尾 吉晴 |
로마자 표기 | Horio Yoshiharu |
출생 | 1542년 |
사망 | 1611년 7월 26일 |
출생지 | 오와리 아이치 현 오구치 |
별명 | 모스케 |
가문 정보 | |
가문 | 마쓰에 번 |
아버지 | 호리오 야스하루 |
형제 | 호리오 요시카쓰, 호리오 우지미쓰 |
배우자 | 다이호도노 (쓰다 씨) |
자녀 | 호리오 가네스케, 호리오 다다우지, 호리오 우지야스, 이시카와 다다후사의 아내, 호리오 이나바의 아내, 노노무라 가와치의 아내, 이케다 비추노카미의 아내, 히라이 곤자에몬의 아내, 가모 야고에몬의 아내 |
직위 | |
신분 | 다이묘, 주로 |
관위 | 종4위하, 다이토노카미 |
봉직 | |
소속 | 오다 가문 도요토미 가문 도쿠가와 가문 도쿠가와 막부 |
섬긴 주요 인물 | 오다 노부야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 |
군사 경력 | |
주요 전투 | 이나바야마 공방전 덴모쿠잔 전투 다카마쓰성 전투 야마자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 도야마 전투 규슈 정벌 오다와라 포위전 |
기타 | |
묘소 | 교토시 우쿄구 하나조노 묘신지 탑두 슌코인 시마네현 야스기시 히로세초 간쿠라지 와카야마현 고야산 오쿠노인 |
통치자 | |
마쓰에 번의 영주 | 시작: 1590년 종료: 1599년 계승자: 호리오 다다우지 |
2. 생애
1543년(덴분 12년), 오와리 국니와 군오구치 촌(현재의 아이치현 니와 군오구치정)의 토호인 호리오 야스하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와리 상사군의 슈고다이인 이와쿠라 오다 씨(오다 이세모리가)의 오다 노부야스를 섬기는 중직이었으며, 마찬가지로 같은 오다 씨를 섬겼던 야마우치 모리토요(야마우치 가즈토요의 아버지)와 함께 서명한 문서가 남아있다.
당시 이와쿠라 오다 씨는 측류인 오다 단죠다이가의 오다 노부나가에게 압박받고 있었고, 1559년(에이로쿠 2년) 요시하루의 첫 출진인 이와쿠라 성 전투에서 선봉을 맡아 전공을 세웠으나, 이와쿠라 오다 씨가 멸망하자 아버지와 함께 浪人이 되었다.[1] 이후 오와리를 통일한 노부나가를 섬기게 되었고, 곧 그의 가신 기노시타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속하게 되었다.[1]
이후 히데요시를 따라 여러 곳을 전전하며 전투에 참여했는데, 특히 1567년 (에이로쿠 10년) 이나바야마 성 공략에서는 이나바야마 성으로 통하는 뒷길 안내 역할을 맡아 오다 군의 승리를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1573년(덴쇼 원년)에는 오미국 나가하마에 100석을 받았다. 이후에도 여러 전공을 세워 하리마국 히메지에서 1,500석, 탄바국 쿠로에에서 3,500석으로 증가되었다.
1582년(덴쇼 10년) 비추고마쓰성 공략에서는 적장 시미즈 소지의 검시 역할을 맡았다. 야마자키 전투에서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호리 히데마사와 나카무라 카즈우지와 함께 선봉의 철포 대장으로 참전했다. 덴노산 쟁탈전에서 적장을 토벌하는 공을 세워, 탄바국 히카미군 내(쿠로이성)에서 6,284석을 받았다.[3]
1583년(덴쇼 11년) 4월 20일, 히데요시가 출진한 후에도 요시하루는 오가키성에 남아 우지 ಬಿಜೆ 나오마사를 설득하여 함께 히데요시를 따라 센가쿠(賤ヶ岳)로 출진했다. 히데요시 본진 후방의 안전을 책임진 요시하루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고, 나오미치를 센가쿠 출진으로 이끈 공적은 컸다. 요시하루와 나오미치의 주고받은 이야기는 『譜牒餘録』에도 나오는 것을 보아 거의 사실로 볼 수 있다. 와카사의 타카하마성을 받은 것도 이러한 공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해, 와카사국타카하마에서 1만 7,000석으로 증가되었고, 1584년(덴쇼 12년)에는 2만 석으로 증가되었다.
1585년(덴쇼 13년) 사사 나리마사 정벌에 참전했다. 타나카 요시마사, 나카무라 카즈우지, 야마우치 카즈토요, 이치야나오 나리쓰네 등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숙로로 임명되었다. 와카사국 사가키(현 후쿠이현미카타군미하마정) 2만 석으로 이봉되었고, 60일 후인 윤 8월에는 오미국 사와야마성(시가현히코네시 주변)에 4만 석을 받고 이봉되었다. 사가키에서는 조세권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호리오케 기록』). 오미의 요충지에 영지를 이봉 받은 것은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587년(덴쇼 15년) 규슈 평정에 참전하여 정5위하 다이토우쵸에 서임되었다.
1590년(덴쇼 18년)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여 히데쓰구 휘하에서 야마나카성 공략에 참가했다. 이 전투 중에 함께 출진했던 적자 호리오 키스케가 전사했다. 오다와라 성 함락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옛 영지였던 토토미국하마마쓰성주 12만 석에 봉해졌고, 도요토미 성도 허락받았다. 히데쓰구로부터 독립적인 입장이 된 탓인지, 후일의 히데쓰구 사건에는 연좌되지 않았다. 쿠노헤 마사자네의 난에도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히데요시 말년에는 나카무라 카즈우지, 이코마 치카마사와 함께 "산츄로"에 임명되었다고 하나, 현대 연구에서는 실존하지 않는 제도로 여겨진다.[4]
1598년(게이초 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접근하여 이시다 미쓰나리, 마에다 도시이에 등 반(反) 이에야스파와의 조정과 중개 역할을 맡았다. 1599년(게이초 4년) 2월 5일, 이에야스의 중신 이이 나오마사가 요시하루에게 감사장을 보냈다.
고령을 이유로 1599년(게이초 4년) 10월 1일, 가독을 차남 호리오 타다우지에게 양위하고 은거하였다. 이에야스로부터 에치젠 후쿠이에 5만 석을 은거료로 받았다. 이는 이에야스로부터 지행을 받은 최초의 사례이다.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가담했다. 이에야스가 아이즈 정벌에 나설 때 하마마쓰에서 타다우지와 함께 환대하고 종군을 요청했으나, 타다우지로만 충분하다 하여 에치젠으로 귀국을 명령받았다.
귀국 도중 7월, 미카와국 이케코부나(현재 아이치현치타시)에서의 연회 중 말다툼 끝에, 미노 카가노이 성주 카가이 시게모토가 미카와 카리야 성주 미즈노 타다시게를 살해하였다. 요시하루도 공격받았으나, 17곳의 창상을 입었음에도 반격하여 살해했다. 타다시게의 가신에게 살해 주범으로 오인되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교토시춘광원에 있는 요시하루 목상에는 왼쪽 뺨에 깊은 상처 흔적이 있는데, 이때의 상처로 추측된다.
이 사건 때문에 9월 본전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에치젠으로 귀국하였다. 대신 출진한 타다우지가 전공을 세워 이즈모국후타 24만 석으로 가증 이봉되었다. 요시하루는 오미와 북국의 정세를 이에야스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1604년(게이초 9년), 풍신(豊臣) 성씨를 하사받았다.[5] 같은 해, 타다우지가 요절하여 손자 호리오 타다하루가 가독을 계승하였으나, 어린 나이였기에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같은 해, 이웃 나라 호키국 요나고번(米子藩)의 나카무라(中村) 가의 가내 싸움(요나고(米子)번의 요코타(横田) 소동)에서 나카무라 가즈타다의 지원 요청을 받아 지원 출병하여 소동을 진압하였다.
1611년(게이초 16년), 마쓰에성을 건축하고 거점을 옮겼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6월 17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69세였다.
2. 1. 오다 노부나가 시대
1543년(덴분 12년), 오와리 국니와 군오구치 촌 (아이치현 니와 군오구치정)의 토호인 호리오 야스하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와리 상사군의 슈고다이인 이와쿠라 오다 씨(오다 이세모리가)의 오다 노부야스를 섬기는 중직이었으며, 마찬가지로 같은 오다 씨를 섬겼던 야마우치 모리토요(야마우치 가즈토요의 아버지)와 함께 서명한 문서가 남아있다.당시 이와쿠라 오다 씨는 측류인 오다 단죠다이가의 오다 노부나가에게 압박받고 있었고, 1559년(에이로쿠 2년) 요시하루의 첫 출진인 이와쿠라 성 전투에서 선봉을 맡아 전공을 세웠으나, 이와쿠라 오다 씨가 멸망하자 아버지와 함께 浪人이 되었다.[1] 이후 오와리를 통일한 노부나가를 섬기게 되었고, 곧 그의 가신 기노시타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속하게 되었다.[1]
1567년 오다 노부나가가 이나바야마 성을 공격했을 때, 요시하루는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1]
2. 2. 하시바, 도요토미 가신 시대
호리오 요시하루는 멧돼지를 씨름하는 모습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인 후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1567년 오다 노부나가가 이나바야마 성을 공격했을 때, 요시하루는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1]1582년 덴모쿠잔 전투 이후, 요시하루는 오야마다 노부시게가 오다 씨 진영으로 갔을 때 그를 처형했다. 히데요시가 비추 다카마쓰 성을 공격했을 때, 요시하루는 시미즈 무네하루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노부나가 사후, 그는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호리오 요시하루는 야마자키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진영을 지나치려 한 사이토 도시카즈를 죽였다.[2] 그는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585년 요시하루는 사사 나리마사에 대한 도야마 원정에 참여했다. 또한 1587년에는 규슈 정벌에 참여하여 종5위하 경호직의 칭호를 받았다.
1590년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공성전의 공로로 그에게 도토미국 하마마쓰에서 12만 석을 하사했다. 호리오 요시하루, 나카무라 카즈우지, 이코마 치카마사는 히데요시의 말년에 임명된 3명의 중로였으며, 도요토미 정권에 참여했다.
이후 히데요시를 따라 여러 곳을 전전하며 전투에 참여했는데, 특히 에이로쿠 10년(1567년) 이나바야마성 공략에서는 이나바야마성으로 통하는 뒷길 안내 역할을 맡아 오다 군의 승리를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덴쇼 원년(1573년)에는 오미국 나가하마에 100석을 받았다. 이후에도 여러 전공을 세워 하리마국 히메지에서 1,500석, 후에 탄바국 쿠로에에서 3,500석으로 증가되었다.
덴쇼 10년(1582년) 비추고마쓰성 공략에서는 적장 시미즈 소지의 검시 역할을 맡았다. 야마자키 전투에서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호리 히데마사와 나카무라 카즈우지와 함께 선봉의 철포 대장으로 참전했다. 덴노산 쟁탈전에서 적장을 토벌하는 공을 세워, 탄바국 히카미군 내(쿠로이성)에서 6,284석을 받았다.[3]
덴쇼 11년(1583년) 4월 20일, 히데요시가 출진한 후에도 요시하루는 오가키성에 남아 우지 ಬಿಜೆ 나오마사를 설득하여 함께 히데요시를 따라 센가쿠(賤ヶ岳)로 출진했다. 히데요시 본진 후방의 안전을 책임진 요시하루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고, 나오미치를 센가쿠 출진으로 이끈 공적은 컸다. 요시하루와 나오미치의 주고받은 이야기는 『譜牒餘録』에도 나오는 것을 보아 거의 사실로 볼 수 있다. 와카사의 타카하마성을 받은 것도 이러한 공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해(1583년), 와카사국타카하마에서 1만 7,000석으로 증가되었고, 덴쇼 12년(1584년)에는 2만 석으로 증가되었다. 덴쇼 13년(1585년)에는 사사 나리마사 정벌에 참전했다. 타나카 요시마사, 나카무라 카즈우지, 야마우치 카즈토요, 이치야나오 나리쓰네 등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숙로로 임명되었다. 또한 영지도 와카사국 사가키(현 후쿠이현미카타군미하마정) 2만 석으로 이봉되었고, 불과 60일 후인 윤 8월에는 오미국 사와야마성(시가현히코네시 주변)에 4만 석을 받고 이봉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주 영지를 옮겼기 때문에, 사가키에서는 실제로는 조세권은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호리오케 기록』). 또한 오미의 요충지에 영지를 이봉 받았기 때문에, 요시하루는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덴쇼 15년(1587년)의 규슈 평정에도 참전하여 정오위하 다이토우쵸에 서임되었다.
덴쇼 18년(1590년)의 오다와라 정벌에도 참전하여 히데쓰구 휘하에서 야마나카성 공략에 참가했다. 이 전투 중에 함께 출진했던 적자 호리오 키스케가 전사했다. 오다와라 성이 함락된 후, 이러한 전공을 인정받아 간토로 이봉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옛 영지였던 토토미국하마마쓰성주 12만 석에 봉해졌고, 도요토미 성도 허락받았다. 이 무렵 히데쓰구로부터 독립적인 입장이 된 탓인지, 후일의 히데쓰구 사건에는 연좌되지 않았다. 이후 쿠노헤 마사자네의 난에도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고 한다.
히데요시 말년에는 나카무라 카즈우지와 이코마 치카마사 등과 함께 소위 "산츄로"에 임명되었다고 하나, 현대 연구 수준에서는 삼중로는 후세에 만들어진 실존하지 않는 제도로 여겨진다.[4]
2. 3. 세키가하라 전투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호리오 요시하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2] 그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마에다 도시이에 등 반(反) 이에야스파와의 조정 및 중개 역할을 맡았다. 1599년 2월 5일, 이에야스의 중신 이이 나오마사는 호리오 요시하루에게 중개에 대한 감사장을 보냈다.1599년, 요시하루는 가문의 수장직을 아들 호리오 타다우지에게 넘기고 에치젠국 후추에 5만 석의 영지를 받아 은퇴 생활을 보냈다.
1600년, 요시하루는 이에야스의 군대에 참여했다. 아이즈 정벌에 나서는 이에야스를 하마마쓰에서 아들 타다우지와 함께 환대하고 종군을 요청했으나, 이에야스는 타다우지만으로 충분하다며 요시하루에게는 에치젠으로 귀국할 것을 명령했다.
8월 27일, 미카와국 지류(현재의 아이치현 지류시)에서 미즈노 타다시게를 죽인 카가노이 시게모치를 죽였으나, 시게모치에게 부상을 입었다. 이 때문에 10월 21일의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직접 참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요시하루가 시게모치를 죽인 점과 아들 호리오 타다우지가 전투에서 세운 공을 인정하여, 전투 후 이즈모국 토다에 24만 석의 영지를 하사했다. 요시하루는 몰래 오미와 북국의 정세를 이에야스에게 보고했다고도 한다.
2. 4. 에도 시대
1598년, 히데요시(豊臣秀吉) 사후 요시하루(堀尾吉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충성을 맹세했다.1599년, 그는 가문의 수장직을 아들 호리오 타다우지(堀尾忠氏)에게 넘기고 에치젠(越前) 국 후추(府中)에 50000석의 영지를 받아 은퇴 생활을 보냈다.
1600년, 요시하루는 이에야스의 군대에 참여했다. 8월 27일 미카와(三河) 국 지류(知立)에서 미즈노 타다시게(水野忠重)를 죽인 카가노이 시게모치(香跪重望)를 죽였으나, 시게모치에게 부상을 입었다. 그 때문에 10월 21일의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는 참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요시하루가 시게모치를 죽였고 그의 아들 호리오 타다우지(堀尾忠氏)가 전투에서 그의 공을 대신했기에 전투 후 이즈모(出雲) 국 토다(戸田)에 240000석의 영지를 하사했다.
1604년, 호리오 요시하루의 뒤를 이어 가문의 당주가 된 그의 아들 다다우지(忠治)가 요절하였고, 그의 손자인 호리오 타다하루(堀尾忠晴)가 가문을 계승하였다. 타다하루는 나이가 매우 어렸기에(9세), 요시하루는 1611년 자신의 죽음까지 후견인으로서 통치하였다. 요시하루는 인기가 많았고 매우 온화하여 '''호토케(仏) 노 모스케(茂助)'''(仏の茂助)라고 불렸는데, 이는 요시하루가 성인과 같은 인물이었다는 뜻이다. 같은 해, 이웃 나라 호키(伯耆)국 마쓰에(米子)번(藩)의 나카무라(中村)가의 가내 싸움(마쓰에(米子)번의 요코타(横田) 소동 혹은 마쓰에(米子) 소동)에서 나카무라 가즈타다(中村一忠)의 지원 요청을 받아 지원 출병하여 소동을 진압하였다.
1611년, 마쓰에성(松江城)을 건축하고 거점을 옮겼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6월 17일에 사망하였다. 향년 69세였다.[5]
3. 자손
간에이 10년(1633년)에 사망한 호리오 다다하루는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에 호리오씨의 직계는 3대 만에 개역되었다. 호리오 다다하루의 일족은 마쓰에번(호리오 다지마), 니시키번(호리오 단게), 구마모토번(호리오 시게스케 4대) 등에 봉직하여 가문의 명맥을 유지했다. 또한, 방계나 재봉직하지 않은 친족의 자손들도 존재한다.
마에다 겐쵸는 공가·오시오지가 출신이었지만, 마에다 겐이와의 인연으로 마에다를 칭하며 고케기본·마에다가의 초대 당주가 되었다. 그때 도쿠가와 쓰나요시로부터 호리오가의 제사를 잇도록 명령받았다고 한다. 마에다가에서는 지창(행렬 시 가마에 세우는 장창으로, 한 개의 도구. 칼집 모양으로 누구의 행렬인지 구분한다)의 칼집 모양으로 호리오가의 가문과 깃발의 문장인 "분동"을 사용하고 있다. --
막말기의 마에다가 당주·나가토모는 메이지 9년(1876년) 3월 31일에 차남 나가오키(나가요시의 동생)를 분가시켜 호리오 성을 사용하게 하고, 평민적에 편입을 도쿄부청(현재 도쿄도청)에 신청하여 수리되었다.
4. 묘소
호리오 씨(堀尾氏)의 가묘는 교토부 우쿄구 하나조노에 있는 슌코인(春光院)이다.[1]
5. 기타
호리오 요시하루(堀尾吉晴)는 인기가 많았고 매우 온화하여 '''호토케(仏) 노 모스케(茂助)'''(仏の茂助)라고 불렸는데, 이는 요시하루가 성인과 같은 인물이었다는 뜻이다.[2] 호리오 씨(堀尾氏)의 가묘는 교토부(京都府) 우쿄구(右京区) 하나조노(花園)에 있는 슌코인(春光院)이다.[2] 요시하루는 실제로는 번주가 되지 않았지만, 호리오 타다우지(堀尾忠氏) 시대에는 타다우지와 이원집정을 행했고, 호리오 타다하루(堀尾忠晴) 시대에는 어린 타다하루를 대신하여 정무를 대행했기 때문에 마쓰에 번(松江藩)의 초대 번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2]
문록의 역 후, 명나라의 만력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일본국왕"으로 임명하는 고명(誥命)을 보냈지만, 히데요시는 이에 격분하여 요시하루에게 내려주었다.[2] 요시하루는 국서의 훌륭함에 감탄하여 그대로 가져가 보물로 간직하고 있었지만, 후에 딸이 이시카와 다다스미(石川忠総)에게 시집갈 때 혼수품으로 넣어 주었다.[2] 따라서 이 국서는 그대로 이시카와가(石川家)에 전해져 후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2] 전후, 한때 민간에 유출되었지만, 후에 오사카시가 매입하여 오사카시립박물관(후에 오사카역사박물관으로 이전)의 소장품으로 현재도 보관되고 있다.[2] 따라서 시대극 등에서 격분한 히데요시가 국서를 찢어 버리는 장면은 후세의 창작으로 사실이 아니다.[2]
6. 관련 작품
호리오 요시하루를 다룬 작품으로는 나카무라 아키히코의 소설 『전국, 하루카나레도 호리오 요시하루의 생애』(고분샤, 2015년)가 있다.
드라마로는 다음 작품들이 있다.
6. 1. 소설
나카무라 아키히코의 소설 『전국, 하루카나레도 호리오 요시하루의 생애』(고분샤, 2015년)가 있다.6. 2. 드라마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2]
서적
Toyotomi Hideyoshi
https://archive.org/[...]
Osprey Publishing
2010
[3]
서적
日本城郭大系 第12巻 大阪・兵庫
新人物往来社
[4]
학술지
内府(家康)東征の真相と直江状
[5]
학술지
羽柴氏下賜と豊臣姓下賜
[6]
웹사이트
特別展 「浜松城主 堀尾吉晴」
https://www.city.ham[...]
浜松市
2024-05-12
[7]
웹사이트
<特別展>戦国の世を馳せた武将 堀尾吉晴
https://matsu-reki.j[...]
松江市立松江歴史館
202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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